경제학 역사 입문

1971년에 무슨 일이 있었나

닉슨이 금본위제를 폐지한 그날, 세상의 모든 경제 지표가 방향을 틀었다.

· 9분 소요

1971년 8월 15일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TV에 나와 발표했다. “외국 정부가 달러를 금으로 교환하는 것을 일시적으로 중단한다.”

“일시적 조치"라고 했다. 50년이 넘은 지금, 한 번도 해제된 적이 없다.

이날 이후 미국 달러는 — 그리고 달러에 연동된 전 세계 모든 통화는 — 금과의 마지막 끈이 끊어졌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지구상의 모든 화폐가 아무것에도 뒷받침되지 않는 종이가 되었다.

금본위제

금본위제란 화폐의 가치를 금에 묶어두는 시스템이다. 핵심은 단순하다. 정부가 가진 금만큼만 돈을 찍을 수 있다. 더 찍고 싶어도 금이 없으면 못 찍는다. 이것이 건전화폐 의 원리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44개국 대표가 미국 뉴햄프셔의 브레턴우즈에 모였다. 여기서 만든 것이 브레턴우즈 체제다. 미국 달러를 금 1온스 = 35달러로 고정하고, 다른 나라 통화는 달러에 고정한다. 외국 정부는 언제든 달러를 가져와 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미국이 돈을 너무 많이 찍으면 다른 나라가 달러를 금으로 바꿔갈 테니, 자연스럽게 브레이크가 걸리는 구조였다.

닉슨은 왜 약속을 깼나

미국이 그 브레이크를 무시했다.

1960년대 미국은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과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복지 프로그램. 둘 다 돈을 먹는 괴물이었고, 미국은 금 보유량을 훨씬 넘는 달러를 찍어냈다.

프랑스의 드골이 먼저 눈치챘다. 대량의 달러를 금으로 바꾸기 시작했고, 다른 나라들도 따라 했다. 미국의 금 보유량은 1950년대 2만 톤에서 1971년 8,100톤으로 쪼그라들었다.

닉슨 앞에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지출을 줄이고 약속을 지키거나, 약속을 깨거나. 정부에게 지출을 줄이라는 건 숨을 참으라는 것과 같다. 닉슨은 약속을 깼다.

그 이후

1971년을 기점으로 주요 경제 지표들이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구매력 붕괴. 달러의 구매력은 1971년 이후 약 87% 하락했다. 1달러로 살 수 있던 것이 이제 7.5달러가 필요하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1980년에 500원이던 자장면이 지금 7,000원이 넘는다. 법정화폐 의 불가피한 결과다.

임금과 생산성의 이혼. 1948년부터 1971년까지, 생산성이 오르면 임금도 같이 올랐다. 더 많이 만들면 더 많이 번다. 당연한 관계였다. 1971년 이후 이게 깨졌다. 생산성은 계속 올라갔는데 실질임금은 거의 멈췄다. EPI 데이터 기준 1979~2020년 생산성은 60% 올랐고 실질임금은 16%만 올랐다. 나머지는 전부 자산을 가진 쪽으로 갔다.

불평등 폭발. 새로 찍은 돈은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도달하지 않는다. 정부와 대형 은행이 먼저 받고, 물가가 오르기 전에 자산을 산다. 일반인이 월급으로 그 돈을 받을 때쯤이면 이미 물가는 올라 있다. 칸티용 효과 (Cantillon Effect)다. 법정화폐 시스템에서 화폐 발행은 가난한 쪽에서 부유한 쪽으로 부를 옮기는 장치다.

부채 폭발. 브레이크를 떼어냈으니 결과는 뻔하다. 미국 연방 부채는 1971년 4,000억 달러에서 2025년 36조 달러를 넘겼다. 한국도 2000년 111조 원이던 국가채무가 2024년 1,100조 원을 넘었다. 이 빚을 갚을 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세대다.

주거 위기. 찍어낸 돈은 자산 시장으로 흘러갔다. 1971년 미국에서 집 한 채는 연 소득의 2.5배였다. 지금은 7배. 서울은 15~18배. 부모 세대가 몇 년 모아서 집을 살 수 있던 시대는 끝났다. 집이 비싸진 게 아니다. 돈이 싸진 거다.

근본 원인은 하나다

구매력 하락, 임금 정체, 불평등, 부채, 주거 위기.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전부 같은 뿌리에서 나온 증상이다. 화폐의 건전성이 파괴된 것.

건전하지 않은 화폐는 가격 신호를 왜곡하고, 왜곡된 신호는 잘못된 결정으로 이어진다. 오스트리아 경제학 이 100년 전부터 경고한 것이 그대로 벌어지고 있다.

저축의 가치가 매년 줄어드는 시스템에서 합리적인 사람은 저축하지 않는다. 빚을 내서 자산을 사거나, 지금 당장 써버린다. 시간선호 가 강제로 높아지는 것이다.

비트코인이 여기서 시작된다

비트코인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 등장했다. 사토시 나카모토가 제네시스 블록에 새긴 문장 — “The Times 03/Jan/2009 Chancellor on brink of second bailout for banks.” 은행을 또 구제금융하겠다는 그날의 헤드라인이다.

2,100만 개라는 절대적 공급 한도. 어떤 정부도 바꿀 수 없는 통화 정책. 작업증명 이라는 물리적 제약. 비트코인은 닉슨이 끊어버린 연결 고리를 다시 만든다.

1971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면, 지금 경제가 왜 이런지 보인다. 그리고 비트코인이 왜 존재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