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비트코인경제학

반야심경과 트러스트리스

반야심경은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 가르친다. 비트코인은 신뢰가 곧 취약함이고 트러스트리스가 곧 자유라 가르친다. 두 가르침의 공명은 비유보다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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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짧은 경전, 가장 깊은 가르침

반야심경은 궁극의 진리를 가장 압축해 담은 불교 경전이다. 한자 260자 남짓, 트윗 몇 개보다도 짧은 분량으로, 마음이 단단하고 영원한 실재를 지어내는 데 쓰는 모든 개념을 해체한다. 그 한복판에 놓인 선언은 종교 문헌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구절에 속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

이천 년 동안 이 구절은 동아시아의 절마다 매일 독송되었다. 수행자들은 그 뜻을 풀어내는 데 평생을 썼다. 그런데 정작 핵심은 놀랄 만큼 직설적이다. 단단하고 스스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것 가운데 실제로 그런 것은 없다는 말이다. 모든 현상은, 사물이든 제도든 자아든, 조건들이 잠시 모인 결과이며 독립된 본질이 비어 있다.

허무주의가 아니다. 경전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고 말한다. 탁자 위의 컵은 실재한다. 다만 영원하고 자기완결적인 "컵의 본질"은 아니다. 흙과 물과 열, 도공의 의도, 그리고 그것을 컵이라 부르는 나의 행위가 한순간 모인 배치다. 조건 하나를 빼면 "컵"은 사라진다. 우리가 컵이라 부르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과정에 붙인 편리한 이름이다.

이제 돈을 생각해 보자.

돈의 공성

1달러란 무엇인가. 지폐를 한 장 들고 들여다보라. 면과 마로 짠 종이에 초록 잉크가 인쇄돼 있다.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다. 먹을 수도, 그것으로 집을 지을 수도, 몸을 덥힐 수도 없다. 가치는 오로지 공유된 믿음의 그물에서 나온다. 정부가 가치 있다고 선언하고, 상인이 받기로 합의하고, 고용주가 그것으로 임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동 중인 공성이다. 달러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독립된 본질이 없다. 그 "돈임"은 전적으로 조건에 의존한다. 정부의 법령, 제도에 대한 신뢰, 집단적 합의, 그리고 초인플레이션이 없다는 사실. 조건 하나만 바뀌어도, 혁명이든 은행 붕괴든 신뢰의 상실이든, 달러의 가치는 증발한다. 2018년에 베네수엘라 볼리바르를 쥐고 있던 사람에게 물어보면 된다.

반야심경이라면 이것을 즉시 알아볼 것이다. 달러는 공한 색이다. 단단하고 영원해 보이지만 실은 변할 수 있고 실제로 변하는 조건들에 전적으로 기대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영원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가치 저장소처럼 다룬다. 그렇지 않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애착으로서의 신뢰

불교 심리학에서 괴로움은 애착에서 일어난다. 영원하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인 양 붙잡는 데서 온다. 우리는 자아에, 관계에, 소유물에, 생각에 매달린다. 가르침의 요지는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어긋나 있다는 것이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으려 하니 괴로움이 따라온다.

전통적인 금융 시스템은 구조적으로 똑같은 무늬 위에서 돌아간다. 애착으로서의 신뢰다.

은행에 돈을 맡길 때 우리는 하나의 믿음에 매달린다. "이 기관은 약속을 지킬 것이다." 신용카드를 쓸 때는 비자가 거래를 공정하게 처리하리라는 믿음에 매달린다. 국채를 들고 있을 때는 정부가 빚을 갚으리라는 믿음에 매달린다. 금융 시스템의 층마다 신뢰가 한 겹씩 얹혀 있고, 그것은 곧 제도의 영속성에 대한 애착이 한 겹씩 쌓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든 애착이 그렇듯 이 믿음도 주기적으로 배신당한다. 은행은 무너진다(리먼 브라더스, 실리콘밸리은행). 결제 사업자는 계좌를 얼린다(위키리크스, 캐나다 트럭 운전사들). 정부는 채무를 불이행하거나 인플레이션으로 녹여 없앤다(역사상 모든 명목화폐가 그랬다). 이 무늬는 우연이 아니다. 영속하지 않는 제도를 신뢰해야만 돌아가는 시스템이라면 반드시 따라오는 성질이다.

반야심경의 가르침이 정확히 이 지점을 겨눈다. 우리가 신뢰하는 제도는 우리가 그것에 투사하는 영속성이 비어 있다. 그 제도의 신뢰성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그것이 무너질 때 우리를 무너뜨리는 바로 그것이다.

비집착으로서의 트러스트리스

비트코인에서 가장 유명한 격언인 "신뢰하지 말고 검증하라"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 냉소처럼 들린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렌즈로 읽으면 지혜에 훨씬 가깝다.

비트코인은 누구도 신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개발자도, 채굴자도, 어떤 기관도, 어떤 정부도 아니다. 프로토콜의 규칙은 수학이 강제하고 참여자 각자가 독립적으로 검증한다. 30만 원짜리 컴퓨터로 노드를 돌려 비트코인 전체 역사의 모든 거래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검증은 누군가의 정직함이나 유능함이나 선의에 기대지 않는다.

이것은 신뢰의 제거가 아니라 신뢰의 초월이다. 비트코인의 설계는 반야심경이 가르치는 바를 인정한다. 모든 제도는 영속하지 않으며, 신뢰받는 모든 권위는 우리가 투사한 신뢰성이 비어 있다는 것. 새로운 기관에 대한 믿음을 또 요구하는 시스템을 하나 더 짓는 대신, 비트코인은 믿음 자체를 요구하지 않는 시스템을 짓는다.

이것이 구조적 비집착이다. 프로토콜은 어떤 권위에도 매달리지 않는다. 어느 한 참여자의 선의에도 기대지 않는다. 불교적 의미에서 그것은 공하다. 중심이 되는 자아가 없고, 본질적인 관리자가 없고, 부패하거나 포획될 수 있는 핵이 없다. 그리고 바로 그 공함 때문에, 기관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견고함을 얻는다.

색즉시공, 블록체인

블록체인 자체도 반야심경의 렌즈로 보면 흥미로운 대상이다.

블록 하나하나는 색이다. 거래와 시각 기록과 암호학적 증명을 담은,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한 자료 구조다. 디지털 산물이 가질 수 있는 만큼은 "실재"한다. 독립적으로 검증되고, 수학적으로 확실하며, 영구히 기록된다.

그런데 블록체인에는 물리적 실체가 없다. 어느 한 장소에 저장돼 있지 않다. 수천 대의 컴퓨터에 복제된 패턴이며, 그중 어느 것도 권위를 갖지 않는다. 사본 하나를 파괴해도 블록체인은 이어진다. 절반을 파괴해도 이어진다. 블록체인은 공한 색이다. 구체적이고 검증 가능하면서도 분산돼 있고 장소가 없으며, "블록체인은 여기 산다"고 가리킬 중심 본질이 없다.

작업증명은 이 대응을 더 깊게 만든다. 각 블록은 에너지 소모로 지켜진다. 실재하는 물리적 에너지가 수학적 증명으로 변환된다. 그 보안은 만질 수 있고, 측정할 수 있고, 값이 매겨진다. 그런데 그것이 만들어내는 것은 만질 수 없다. 거래 순서에 대한 공유된 합의다. 물리적 에너지가 비물리적 합의를 낳는다. 색이 공이 되고 공이 다시 색이 된다.

공성을 체계화한 철학자 용수(나가르주나)라면 이 구조를 알아볼 것이다. 블록체인은 순전히 있는 것도 아니고 순전히 없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연기(緣起)다. 그것을 이루는 참여자와 컴퓨터와 규칙의 그물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현상이다. 참여자를 걷어내면 블록체인은 그저 데이터다. 데이터를 걷어내면 참여자에게는 합의할 대상이 없다. 어느 쪽도 먼저가 아니다. 둘은 함께 일어난다.

아제아제, 검증의 진언

반야심경은 진언으로 끝난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가자 가자 저 너머로 가자, 완전히 저 너머로 가자, 깨달음이여!

이 진언은 해방의 선언이다. 본래부터 있다는 착각으로부터, 겉모습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무엇이 실재인지 권위에게 물어야 하는 의존으로부터의 해방이다.

비트코인은 제 영역에서 이와 나란한 해방을 실행한다. 잔액이 맞는지 은행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내 돈이 가치 있는지 정부에게 물을 필요가 없다. 내 거래가 일어났는지 어떤 기관에게도 물을 필요가 없다. 스스로 검증할 수 있다. 신뢰 너머로 건너간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늘인 비유가 아니라 구조의 일치다. 반야심경과 비트코인은 같은 근본 문제를 다룬다. 실재의 검증을 외부 권위에 외주 주려는 우리의 습관이다. 경전은 말한다. 경험을 곧바로 들여다보고 겉모습에 본래의 존재가 없음을 보라. 비트코인은 말한다. 노드를 돌려 거래가 규칙을 따르는지 확인하라. 두 경우 모두 가르침은 같다. 직접 검증할 수 있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돈의 중도

불교의 중도는 상견(사물이 영원히 존재한다)과 단견(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이라는 두 극단을 피한다. 반야심경은 이를 완벽하게 구현한다. 색을 부정하지 않되 그것의 궁극적 견고함을 부정한다.

비트코인은 화폐 설계에서 이와 나란한 중도를 간다. 절대적 신뢰라는 극단(정부와 은행을 완전히 믿어야 하는 명목화폐)도, 절대적 불신이라는 극단(어떤 교환 매개도 믿지 않는 물물교환)도 피한다. 비트코인은 제도에 대한 신뢰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공유된 교환 매개로 기능하는 돈이다. 신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신뢰가 필요 없는 것이다. 신뢰는 인간의 제도가 아니라 수학과 공개된 코드에 놓인다.

이 중도가 비트코인을 오래가게 한다. 어떤 권위의 선의에도 기대지 않으니 부서지기 쉽지 않고, 돈이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하지도 않으니 쓸모없지 않다. 두 극단 사이의 자리를 찾은 것이다. 아무도 신뢰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작동하는 돈이다.

경전은 모든 고정된 자리 너머를 가리킨다. 비트코인은 제도적 의존 너머를 가리킨다. 둘은 같은 통찰에 이른다. 자유는 신뢰할 만한 올바른 권위를 찾는 데서 오지 않고, 권위를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실재와 관계 맺는 데서 온다.

경전의 마지막 말은 사바하다. 경이와 완성의 감탄이다. 두 가르침을 함께 이해하는 이에게 경이는 그 수렴에 있다. 이천 년 된 기도와 열일곱 살 된 프로토콜이, 그토록 다른 출발점에서, 그토록 닮은 목적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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