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가 말하지 않으려 한 마음
유식은 마음의 가장 깊은 층을 아뢰야식이라 불렀다. 해심밀경이 그것을 범부에게 말하지 않으려 한 이유와 붓다가 처음 설법을 망설인 까닭이 같은 말에서 만난다. 여덟 가지 식, 씨앗과 훈습, 폭류처럼 흐르는 마음, 그것을 나로 붙잡는 말나식, 꿈과 고름 강의 비유, 세 가지 성품, 원측과 원효, 그리고 식이 지혜로 바뀌는 자리까지.
감추어 둔 가르침
경전이 무언가를 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밝히는 일은 드물다. 『해심밀경』은 그렇게 한다. 마음의 가장 깊은 층을 설명한 뒤, 붓다는 게송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阿陀那識甚深細 一切種子如瀑流 我於凡愚不開演 恐彼分別執為我
아다나식은 깊고 미세하여, 모든 씨앗을 품고 폭류처럼 흐른다. 나는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이것을 펼쳐 말하지 않으니, 그들이 분별하여 이것을 나로 붙잡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가르치면서 동시에 가르침을 거두는 문장이다. 마음의 밑바닥에 모든 것을 담고 끊임없이 흐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는 순간, 듣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내가 찾던 나라고 여기기 쉽다. 무아를 말해 온 불교가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를 설명하려 할 때 부딪힌 위험이 이 게송 한 줄에 들어 있다. 이 마음을 다루는 대승의 학파가 유식(唯識)이다.
집착이라는 이름
이 깊은 마음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뢰야식이다. 산스크리트 알라야(ālaya)를 소리대로 옮긴 말로, 무언가가 머물고 쌓이는 곳, 곧 창고나 집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은 초기 경전에서 다른 얼굴로 먼저 나온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가르침을 펼칠지 망설이는 장면이다.
Ālayarāmā kho panāyaṁ pajā ālayaratā ālayasammuditā.
이 사람들은 알라야를 즐기고, 알라야에 기뻐하며, 알라야에 들떠 있다.
여기서 알라야는 붙잡음, 집착이다. 사람들이 붙잡는 것을 즐기니 연기라는 이치를 보기 어렵고, 그래서 가르쳐도 피곤할 뿐이리라고 붓다는 생각한다(MN 26, SN 6.1). 두 장면을 나란히 놓으면 묘한 대칭이 생긴다. 초기 경전의 붓다는 사람들이 알라야를 즐기기 때문에 말하기를 망설이고, 『해심밀경』의 붓다는 알라야식을 나로 붙잡을까 봐 말하지 않는다. 같은 말이 한쪽에서는 집착이고 다른 쪽에서는 집착의 대상이 될 만한 마음이다.
초기 경전에도 마음이 이어지는 흐름에 대한 말은 있다. 『디가 니까야』는 의식의 흐름(viññāṇasota)이 이 세상과 저 세상 양쪽에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DN 28). 유식은 이 흐름에 구조를 주려 한 시도였다.
여섯 다음의 두 식
초기 불교가 말한 식은 여섯이다. 눈, 귀, 코, 혀, 몸의 다섯 감각에 각각 하나씩 붙는 앎과, 그것들을 모아 생각하는 의식(意識)이다. 유식은 그 아래에 두 층을 더했다. 4세기에서 5세기 무렵 인도의 무착과 세친 형제가 이 체계를 세웠고, 세친의 『유식삼십송』이 그 뼈대다. 첫머리는 이렇다.
由假說我法 有種種相轉 彼依識所變 此能變唯三
나와 법을 임시로 말하기 때문에 갖가지 모습이 굴러 나오는데, 그것은 모두 식이 변해 나타난 것에 의지한다. 이렇게 변해 나타나게 하는 것은 셋뿐이다.
셋은 무르익어 결과를 내는 식, 헤아리는 식, 대상을 분별하는 식이다. 대상을 분별하는 식이 앞의 여섯이고, 헤아리는 식이 일곱째 말나식(末那識), 무르익어 결과를 내는 식이 여덟째 아뢰야식이다. 송은 이어서 첫째 능변식을 아뢰야식이라 부르고, 그것이 모든 씨앗을 품는다고 말한다.
『해심밀경』은 같은 식에 이름 셋을 주고 까닭을 단다. 몸을 따라다니며 붙들어 지니기 때문에 아다나식이라 하고, 몸에 거두어 감추어져 편안함과 위태로움을 함께하기 때문에 아뢰야식이라 하며,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을 모아 쌓아 자라게 하기 때문에 마음(心)이라 한다. 붙든다, 감춘다, 쌓는다. 세 이름이 이 식이 하는 일을 나누어 말한다.
씨앗과 향기
아뢰야식이 품는다는 씨앗(種子)은 무엇인가. 현장이 호법의 해석을 중심으로 엮은 『성유식론』은 이렇게 정의한다.
謂本識中親生自果 功能差別
근본식 가운데서 자기 결과를 직접 낳는 서로 다른 힘이다.
씨앗은 물건이 아니라 힘이다. 한 번 화를 내면 화를 낼 힘이 남고, 한 번 너그러우면 너그러울 힘이 남는다. 그 힘이 아뢰야식에 남겨지는 과정을 유식은 훈습(熏習)이라 불렀다. 『성유식론』은 이것을 참깨에 향을 들이는 일(如熏苣蕂)에 빗댄다. 흔히 꽃과 함께 두어 향을 입힌 참깨에서 짠 기름에 꽃향기가 남는 것으로 풀이되는 비유다. 지금의 마음 작용이 근본식에 배어 들어 다음의 씨앗이 된다.
이렇게 보면 업은 장부에 적히는 빚이 아니라 몸에 배는 향에 가깝다. 씨앗은 조건을 만나면 다시 마음의 작용으로 피어나고, 피어난 작용은 다시 씨앗을 남긴다. 유식은 이 순환으로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시간을 건너 이어지는지를 설명했다.
폭류처럼 흐르는 것
그렇다면 아뢰야식은 영혼과 무엇이 다른가. 『유식삼십송』의 넷째 송이 답한다. 아뢰야식은 늘 구르며 흐르는 것이 폭류와 같고, 아라한의 자리에 이르면 버려진다(恒轉如瀑流 阿羅漢位捨). 『성유식론』은 이 구절을 한 자씩 푼다.
恒言遮斷 轉表非常 猶如瀑流 因果法爾
늘(恒)이라는 말은 끊어짐을 막고, 구른다(轉)는 말은 항상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폭류처럼 원인과 결과가 본래 그러하다.
폭포 아래로 쏟아지는 물은 한순간도 같은 물이 아니지만 흐름은 끊어지지 않는다. 찰나마다 결과가 생기므로 끊어지지 않고, 찰나마다 원인이 사라지므로 항상하지 않다. 아뢰야식은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아니라, 끊어지지 않고 변하는 흐름이다. 무아를 말하는 불교가 누가 업을 받고 누가 다시 태어나는가라는 물음에 내놓은 대승의 답이 이것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마저 아라한에 이르면 버려진다.
나라고 붙잡는 마음
이제 『해심밀경』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해진다. 유식은 그 두려움을 체계 안에 넣어 두었다. 일곱째 말나식이 바로 그 일을 한다. 『성유식론』은 말나식이 무엇을 대상으로 삼는지 묻고 이렇게 답한다.
應知此意但緣藏識見分非餘 彼無始來一類相續似常一故 恒與諸法為所依故 此唯執彼為自內我
이 마음은 오직 장식(藏識)의 보는 부분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이 시작 없는 때부터 한결같이 이어져 항상하고 하나인 것처럼 보이고, 늘 모든 법이 의지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오직 그것을 붙잡아 안에 있는 나로 삼는다.
끊어지지 않고 흐르는 것은 멀리서 보면 늘 그대로인 하나처럼 보인다. 말나식은 그 겉모습을 붙잡아 나라고 여긴다. 잠들어도 꺼지지 않고, 꿈 없는 깊은 잠에서도 쉬지 않는 이 자기 집착이 모든 판단에 먼저 색을 입힌다. 유식에서 무아는 나가 없다는 선언에서 끝나지 않는다. 나를 만들어 내는 장치가 마음 안에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일이다.
바깥은 정말 없는가
유식이라는 이름은 오직(唯) 식(識)뿐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흔히 바깥 세계는 없고 내 마음만 있다는 주장으로 오해된다. 세친의 『유식이십론』은 첫머리에서 이 주장을 이렇게 세운다.
內識生時似外境現 如有眩瞖見髮蠅等 此中都無少分實義
안의 식이 일어날 때 바깥 대상처럼 나타나니, 눈병 난 사람이 머리카락이나 파리를 보는 것과 같다. 여기에는 실재하는 것이 조금도 없다.
반론은 곧바로 나온다. 바깥 대상이 없다면 왜 정해진 곳과 때에만 보이고, 왜 여러 사람이 같은 것을 보는가. 세친은 꿈과 아귀를 끌어온다. 꿈에서도 마을과 동산은 아무 곳에서나 보이지 않고 정해진 곳에 보인다. 그리고 아귀들은 같은 업으로 같은 과보를 받았기에 여럿이 함께 같은 강을 보는데, 그들에게 그 강은 고름이 가득 찬 강이다. 사람에게는 물로, 아귀에게는 고름으로 보이는 한 강. 세계가 함께 보인다는 것은 바깥에 무언가가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보는 이들이 같은 씨앗을 나누어 가졌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아론이 아니다. 유식이 부정하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마음과 상관없이 그 자체로 정해진 모습으로 있는 세계다. 『유식삼십송』의 열일곱째 송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 식이 바뀌어 나타나 분별하는 것과 분별되는 것이 되니, 이로 말미암아 저것들은 모두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오직 식이다.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함께 식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말이다.
세 가지 성품
유식은 이 관계를 세 가지 성품으로 정리했다. 마음이 두루 헤아려 지어 붙인 모습이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고, 여러 조건에 의지해 일어난 것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이며, 의타기에서 앞의 지어 붙임이 늘 떠나 있는 것이 원성실성(圓成實性)이다. 전통적으로는 어둠 속의 새끼줄로 설명한다. 어둠 속에서 새끼줄을 뱀으로 본 것이 변계소집이고, 새끼줄이 짚과 꼬임이라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 의타기이며, 뱀이라는 착각이 걷히고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을 그대로 보는 것이 원성실이다.
『유식삼십송』은 원성실과 의타기가 다르지도 않고 같지도 않다고 말한다. 무상이 무상한 것들과 따로 있지 않듯이, 의타기를 보지 않고서는 원성실을 볼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유식은 공과 만난다. 용수의 중관이 모든 것에 고정된 자성이 없다고 말했다면, 유식은 그런데도 왜 우리에게 그렇게 단단해 보이는지를 마음 쪽에서 물었다. 두 학파는 오래 다투었지만, 같은 공을 다른 방향에서 설명했다고 보는 시각도 그만큼 오래되었다.
장안의 원측
유식은 7세기 중국에서 크게 일어났다. 인도에서 돌아온 현장이 유식 논서를 새로 옮기고, 제자 규기가 그 해석을 이어 법상종을 세웠다. 같은 시기 장안의 서명사에는 신라 출신으로 알려진 원측(圓測)이 있었다. 그가 남긴 『해심밀경소』는 앞의 게송에 나오는 아다나를 이렇게 풀었다.
梵云阿陀那 此翻名執持 謂由此識隨逐於身 執受色根令不失壞 故說此識名為執持
범어로 아다나라 한 것을 여기서는 붙들어 지님이라 옮긴다. 이 식이 몸을 따라다니며 감각 기관을 붙들어 받아들여 무너지지 않게 하므로 이 식을 붙들어 지님이라 한다.
송나라 때 엮인 『송고승전』은 원측에 대한 한 이야기를 전한다. 현장이 규기에게 새로 옮긴 유식론을 강의할 때 원측이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숨어 들은 뒤, 강의가 끝나기도 전에 서명사에서 종을 울려 대중을 모으고 먼저 유식을 강의했다는 것이다. 규기 쪽 시각이 짙게 밴 전승으로 읽히는 이야기지만, 원측의 해석이 규기와 맞설 만큼 독자적이었다는 사실은 남은 저술이 보여 준다. 그의 『해심밀경소』는 티베트어로도 옮겨져 읽혔다.
무덤에서 깬 원효
같은 무렵 신라의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으로 가던 길에 멈추었다. 『송고승전』 의상전은 그 밤을 이렇게 전한다. 비를 피해 흙굴에서 하룻밤을 편히 잤는데, 날이 밝아 보니 옛 무덤 속 해골 곁이었다. 이튿날 밤 같은 자리에 머물자 귀신이 들끓었다. 원효가 탄식했다.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又三界唯心 萬法唯識 心外無法 胡用別求 我不入唐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므로 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다. 또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식이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하겠는가. 나는 당에 들어가지 않겠다.
흔히 알려진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신 이야기는 이 기록에 없다. 그 판본은 송나라 승려 혜홍의 『임간록』에 보인다. 원효의 말 앞부분은 『대승기신론』의 한 구절,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갖가지 법이 사라진다는 문장에 기대어 있다. 『기신론』은 유식과 다른 길로 같은 자리에 닿았다. 그 책은 마음의 생멸하는 면을 이렇게 말한다.
依如來藏故有生滅心 所謂不生不滅與生滅和合 非一非異 名為阿梨耶識
여래장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이 생멸하는 것과 어우러져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을 아리야식이라 한다.
같은 알라야를 『기신론』은 아리야로, 현장은 아뢰야로 옮겼다. 표기만 다른 것이 아니다. 유식의 아뢰야식은 미혹한 식이고 씨앗과 현행이 서로를 낳으며 도는 흐름이지만, 『기신론』의 아리야식에는 생멸하지 않는 여래장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원효는 이 두 길을 모두 읽었고, 한국 불교는 대체로 『기신론』의 길을 따라 마음을 이해해 왔다.
식이 지혜로 바뀌는 자리
유식은 마음의 병리학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은 바뀜이다. 『성유식론』은 여덟 식이 각각 지혜로 바뀐다고 말한다. 아뢰야식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큰 거울 같은 지혜(大圓鏡智)로, 말나식은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지혜(平等性智)로, 의식은 묘하게 살펴보는 지혜(妙觀察智)로, 다섯 감각의 식은 해야 할 일을 이루는 지혜(成所作智)로 바뀐다.
智雖非識 而依識轉 識為主故 說轉識得
지혜는 식이 아니지만 식에 의지해 바뀌니, 식이 중심이 되므로 식을 바꾸어 얻는다고 말한다.
나를 붙잡던 말나식이 평등하게 보는 지혜가 된다는 대목은 유식 전체를 거꾸로 비춘다. 자기 집착의 장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장치가 돌던 자리에서 다른 것이 일어난다. 모든 씨앗을 품던 창고는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앉아서 무엇을 보는가
유식학파의 다른 이름은 유가행파(瑜伽行派)다. 요가를 닦는 이들이라는 뜻이고, 이 학파의 대표 논서도 『유가사지론』, 곧 요가 수행자의 단계에 관한 논서다. 유식은 처음부터 책상 위의 이론이 아니라 앉아서 마음을 보던 사람들이 본 것을 정리한 것이었다.
그 눈으로 보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어떤 말에 반사적으로 화가 났다면, 화를 내는 그 반응이 얼마나 빨리, 얼마나 익숙하게 올라왔는지를 본다. 그 익숙함이 씨앗이다. 그리고 지금 그 화에 다시 기름을 부으면 같은 씨앗이 한 번 더 배어 든다는 것을 안다. 무엇을 되풀이하느냐가 다음의 나를 만든다. 또 하나는 상처받았다는 느낌 바로 아래에서 다쳤다고 여겨지는 나가 무엇인지를 보는 일이다. 말나식은 쉬지 않지만, 그것이 붙잡고 있는 것이 흐름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붙잡는 힘은 조금 느슨해진다.
12연기에서 식과 명색이 서로를 조건으로 삼는다고 한 자리를 유식은 여덟 겹으로 파고들었다. 그 깊이 때문에 유식은 어렵다는 평을 듣지만, 묻는 것은 처음과 같다. 무엇이 있을 때 괴로움이 있는가.
붓다가 말하지 않으려 한 마음
초기 경전의 붓다는 사람들이 붙잡기를 즐겨서 말하기를 망설였고, 『해심밀경』의 붓다는 사람들이 마음의 깊은 층을 붙잡을까 봐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둘 다 결국은 말했다. 망설임은 침묵으로 끝나지 않고 조심스러운 가르침이 되었다.
아뢰야식을 알게 된 사람에게 남는 과제는 그것을 나로 삼지 않는 일이다. 모든 씨앗을 품고 폭류처럼 흐르는 마음은 나의 가장 깊은 정체가 아니라, 내가 매 순간 무엇을 심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밭이다. 붓다가 걱정한 것은 그 밭을 내 것이라고 울타리 치는 일이었다. 밭을 밭으로 보는 동안, 마음은 이미 거울 쪽으로 한 걸음 옮겨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