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소리가 된 자리
염불의 염(念)은 위빠사나의 사띠와 같은 말이다. 부처를 떠올리던 수행이 어떻게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수행이 되었는지, 무량수경의 열여덟째 서원과 관무량수경의 마지막 장면, 담란과 선도가 십념을 읽은 방식, 원효의 두 가지 십념과 혜능의 물음, 그리고 선과 정토가 만나는 자리까지.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
한국 절에서 가장 자주 들리는 말을 하나 꼽으라면 나무아미타불일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스님들이 목탁에 맞추어 부르고, 사십구재와 천도재에서 부르고, 법회가 끝날 때도 부른다.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여섯 글자는 안다.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이고, 이렇게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수행을 염불이라 한다.
그런데 염불의 염(念)은 위빠사나 글에서 본 그 글자다. 팔리어 사띠, 산스크리트 스므리티를 한역이 염이라 옮겼고, 그 뜻은 본래 기억이었다. 그렇다면 염불은 부처를 기억하는 일, 떠올리는 일이어야 한다. 그것이 어떻게 소리 내어 이름을 부르는 일이 되었을까. 이 글은 생각이 소리가 된 그 자리를 따라간다.
부처를 떠올리는 일
초기 경전에도 염불이 있다. 팔리어로는 붓다누사띠(buddhānussati), 붓다를 거듭 떠올림이다. 『상윳따 니까야』의 한 경에서 붓다는 숲이나 나무 아래나 빈집에서 수행하다 두려움이 일어나면 이렇게 하라고 말한다.
mameva tasmiṁ samaye anussareyyātha: "itipi so bhagavā arahaṁ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ṁ buddho bhagavā"ti.
그때는 나를 떠올려라. 그분 세존은 아라한이시며, 바르게 깨달은 분이시며, 앎과 행을 갖춘 분이시며, 잘 가신 분이시며, 세상을 아는 분이시며, 위없는 분이시며, 사람을 길들이는 분이시며, 신과 인간의 스승이시며, 깨달은 분이시며, 세존이시다.
그렇게 떠올리면 두려움과 떨림과 털이 곤두서는 것이 사라진다고 경은 말한다(SN 11.3). 이어서 법을 떠올리고 승가를 떠올리라는 말이 붙는다. 『앙굿따라 니까야』는 더 단호하다. 닦고 익히면 오로지 싫어하여 떠남과 탐욕의 사라짐과 열반으로 이끄는 한 가지 법이 있으니, 그것이 붓다를 떠올리는 것이라고 한다(AN 1.296).
여기서 염불은 부르는 일이 아니다. 붓다가 어떤 분인지를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는 일이다. 아홉 가지 덕을 차례로 떠올리는 동안 마음은 그 덕에 머물고, 두려움이 들어설 자리가 줄어든다. 사띠가 지금 보아야 할 것을 잊지 않는 힘이었다면, 붓다누사띠는 기대야 할 것을 잊지 않는 힘이다.
마흔여덟 가지 서원
대승에 이르러 떠올리는 대상이 바뀐다. 석가모니 한 분이 아니라 시방에 계신 여러 부처, 그 가운데서도 서쪽 세계의 아미타불이다. 그 이야기를 담은 경이 『무량수경』이다. 조위의 강승개가 옮긴 것으로 전하는 한역에서, 법장이라는 비구는 부처가 되기 전에 마흔여덟 가지 서원을 세운다. 내가 부처가 될 때 이러저러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약속들이다. 동아시아 정토 신앙 전체가 그 가운데 열여덟째에 기대어 있다.
設我得佛 十方眾生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覺 唯除五逆誹謗正法
내가 부처가 될 때, 시방의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기뻐하며 내 나라에 나고자 하여 열 번만 염하더라도 나지 못한다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 다만 다섯 가지 무거운 죄를 지은 이와 바른 법을 비방한 이는 제외한다.
법장은 서원을 이루어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경은 말한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이미 지켜졌다. 문제는 열 번의 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열 번 생각하는 것인가, 열 번 부르는 것인가. 경은 이 글자를 풀어 주지 않는다. 이후 천 년 넘게 동아시아 불교는 이 한 글자를 두고 읽기를 거듭했다.
이름을 붙든다는 것
정토의 경전은 흔히 셋을 꼽는다. 『무량수경』과 함께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이다. 구마라집이 옮긴 『아미타경』은 짧고 단순하다.
不可以少善根福德因緣得生彼國 若有善男子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執持名號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若四日 若五日 若六日 若七日 一心不亂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나라에 날 수 없다.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말을 듣고 그 이름을 붙들어,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나흘이나 닷새나 엿새나 이레 동안 한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않으면, 목숨이 다할 때 아미타불이 성중과 함께 그 앞에 나타난다.
여기서 수행의 대상은 이름이다. 이름을 붙든다(執持名號)는 말은 이름을 마음에서 놓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입에서 놓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 『관무량수경』은 정반대처럼 보이는 길을 간다. 해가 지는 모습을 떠올리는 데서 시작해 물과 땅과 나무와 연못과 누각, 아미타불과 두 보살의 몸을 차례로 마음에 그리는 열여섯 가지 관상이다. 염불이 여전히 생각의 일이었던 시절의 수행법이다.
그런데 이 경의 마지막 장면에서 무언가가 바뀐다. 평생 악을 지은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좋은 벗이 와서 부처를 생각하라고 가르치지만, 그는 고통이 너무 급해 생각할 겨를이 없다.
汝若不能念彼佛者 應稱歸命無量壽佛 如是至心令聲不絕 具足十念 稱南無阿彌陀佛
그대가 저 부처를 생각할 수 없다면 무량수불에게 귀의한다고 불러라. 이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여 열 번을 다 채워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
생각할 수 없으면 불러라. 열여섯 가지 관상을 그토록 정교하게 설한 경이 마지막에 남긴 길이 이것이다. 여기서 십념은 열 번의 부름과 겹친다. 생각이 소리가 되는 첫 자리가 이 장면이다.
걷는 길과 배를 타는 길
이 장면에 이론을 붙인 사람들이 중국에서 나왔다. 출발점은 용수의 이름으로 전하는 『십주비바사론』의 한 품이다.
佛法有無量門 如世間道 有難有易 陸道步行則苦 水道乘船則樂
불법에는 한량없는 문이 있다. 세간의 길에 어려운 길과 쉬운 길이 있듯이, 뭍길을 걸어가면 고되고 물길을 배로 가면 즐겁다.
북위의 담란(476~542)은 이 비유를 두 길의 이름으로 굳혔다. 부처가 없는 혼탁한 세상에서 자기 힘만으로 물러서지 않는 경지를 구하는 길은 어려운 길(難行道)이고, 부처를 믿는 인연으로 정토에 나기를 원해 부처의 원력에 올라타는 길은 쉬운 길(易行道)이다. 그는 앞의 것을 자기 힘(自力), 뒤의 것을 다른 힘(他力)이라 불렀다. 이 두 낱말은 이후 정토 사상 전체를 가르는 축이 된다.
담란은 열여덟째 서원의 십념도 풀었다. 아미타불을 생각하는 마음이 다른 생각 없이 열 번 이어지는 것이 십념이고,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와 같다고 했다. 그리고 한 줄을 덧붙인다.
經言十念者 明業事成辨耳 不必須知頭數也
경에서 열 번이라 한 것은 업이 이루어짐을 밝힌 것일 뿐, 반드시 그 수를 헤아릴 필요는 없다.
열 번의 생각, 열 번의 소리
결정적인 걸음은 당나라 선도(613~681)가 내디뎠다. 그는 열여덟째 서원을 자기 말로 다시 적으면서 한 글자를 바꾸었다.
若我成佛 十方眾生稱我名號 下至十聲 若不生者 不取正覺
내가 부처가 될 때, 시방의 중생이 내 이름을 부르기를 아래로 열 번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하여도 나지 못한다면 나는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
경의 십념(十念)이 선도의 『왕생예찬』에서는 십성(十聲)이 되었다. 열 번의 생각이 열 번의 소리로 읽힌 것이다. 선도는 『관무량수경』 주석에서 수행의 무게도 다시 매겼다.
一心專念彌陀名號 行住坐臥 不問時節久近 念念不捨者 是名正定之業 順彼佛願故
한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오로지 염하여, 걷고 머물고 앉고 눕는 가운데 시간이 길고 짧음을 묻지 않고 생각마다 놓지 않는 것, 이것을 바르게 정해진 업이라 한다. 저 부처의 서원에 따르기 때문이다.
경을 읽고 예배하고 찬탄하는 다른 수행은 모두 이것을 돕는 업이 되었다. 이름을 부르는 일이 중심에 서고, 관상은 그 둘레로 물러났다. 오백여 년 뒤 일본의 호넨(11331212)은 1175년 선도의 이 구절을 읽고 오로지 염불만 하는 길을 세웠고, 1198년 『선택본원염불집』에서 그 근거를 정리했다. 일본 정토종의 시작이다. 그의 제자 신란(11731263)은 부르는 일조차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가 베푼 것이라고 보았고, 그 가르침이 정토진종이 되었다. 다른 힘에 맡긴다는 생각이 끝까지 간 자리다.
원효가 읽은 두 가지 십념
같은 물음을 신라의 원효(617~686)도 붙들었다. 『무량수경종요』에서 그는 아래 무리의 십념에 두 가지 뜻이 함께 들어 있다고 했다.
此經中說下輩十念 一言之內含有二義 謂顯了義及隱密義
이 경에서 말하는 아래 무리의 십념은 한 말 안에 두 뜻을 품고 있으니, 드러난 뜻과 숨은 뜻이다.
숨은 뜻의 십념은 『미륵발문경』이 말하는 열 가지 마음이다. 모든 중생에게 자비를 내고,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바르게 부처를 생각하는 것까지 열 가지를 갖추는 일인데, 원효는 이것이 범부가 아니라 초지 이상의 보살이라야 갖출 수 있는 마음이라고 했다. 드러난 뜻의 십념은 『관무량수경』의 마지막 장면 그대로다. 원효는 구마라집의 비유를 빌려 이를 설명한다. 도적에게 쫓겨 강가에 이른 사람이 오직 어떻게 건널까만 생각하듯, 다른 생각이 끼어들 틈 없이 부처를 부르는 것이 십념이라는 것이다. 원효는 두 뜻을 하나로 줄이지 않았다. 같은 열 번이 보살에게는 가장 높은 마음이고 범부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부름이다.
원효는 그 부름을 거리로 들고 나갔다. 『삼국유사』는 그가 광대가 놀리던 큰 박을 얻어 무애(無礙)라 이름 붙이고, 그것을 들고 수많은 마을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었다고 전한다.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佛陀之號 咸作南無之稱
뽕나무 지게문과 깨진 독 들창의 집에 사는 가난한 이들과 원숭이 같은 무리까지 모두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를 부르게 되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소리는 낼 수 있다. 생각이 소리가 되자 염불은 처음으로 모든 사람의 것이 되었다.
혜능이 되물은 것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 길에 고개를 끄덕인 것은 아니다. 『육조단경』에서 한 관리가 혜능에게 묻는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늘 아미타불을 부르며 서방에 나기를 원하는데, 정말 그곳에 날 수 있습니까. 돈황본에 남은 혜능의 대답은 이렇다.
迷人念佛生彼 悟者自淨其心
미혹한 사람은 염불하여 저곳에 나려 하고, 깨친 사람은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한다.
혜능은 서방이 멀지 않다고 하면서 그 거리를 마음의 일로 바꾼다. 열 가지 악을 없애면 십만을 가고, 여덟 가지 삿됨을 없애면 팔천을 지난다고 했다. 후대의 판본은 더 날카롭게 묻는다. 동쪽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서방에 나기를 구한다지만, 서쪽 사람이 죄를 지으면 염불하여 어느 나라에 나기를 구하는가. 혜능에게 정토는 가는 곳이 아니라 깨끗해진 마음이 서 있는 자리였다. 오늘 흔히 듣는 서쪽으로 십만팔천 리라는 말도 경전이 아니라 이 대목에서 나왔다. 육조단경이 선의 경전이 된 데에는 이런 대목들의 몫도 크다.
선과 정토가 만나는 자리
그러나 선이 염불을 버린 것은 아니다. 『대승기신론』은 이미 염불을 수행의 지도 안에 자리 잡아 두었다. 처음 배우는 사람이 바른 믿음을 구하지만 마음이 겁약하여, 이 세상에서는 부처를 늘 만날 수 없으니 믿음을 이루기 어렵겠다고 물러나려 할 때가 있다.
當知如來有勝方便攝護信心 謂以專意念佛因緣 隨願得生他方佛土
여래에게는 믿음을 감싸 지키는 뛰어난 방편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로지 부처를 생각하는 인연으로 원하는 대로 다른 부처의 나라에 나는 것이다.
겁 많은 사람을 위한 방편이라는 말은 낮추어 보는 말이 아니다. 『기신론』에서 이것은 물러서지 않게 하는 장치다. 오대와 송나라 무렵부터 선과 염불을 함께 닦는 흐름이 굳어졌고, 명나라 말의 운서 주굉은 참선한다는 이들이 염불을 낮추어 보는 것을 꾸짖었다. 근대 중국의 허운은 망상이 많아 화두가 잡히지 않는 이에게 염불하는 이가 누구인가(念佛是誰)를 들라고 했다.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그대로 간화선의 물음이 된 것이다. 부르는 소리에 기대는 길과 부르는 이를 묻는 길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난다.
한국의 염불
한국에서 염불은 이론보다 의례로 깊이 뿌리내렸다. 신라 경덕왕 때 금강산 건봉사에서 발징이 만 일 동안 염불하는 모임을 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후대의 사찰 기록에 기댄 이야기지만, 날수를 정해 여럿이 함께 염불하는 모임은 이후에도 여러 절에서 열렸다. 오늘 장례와 사십구재에서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도 이 흐름 위에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생각을 요구하지 않고 소리를 건네는 일, 그것은 『관무량수경』의 마지막 장면을 지금도 되풀이하는 일이다.
선 수행이 중심인 한국 불교에서 염불은 오랫동안 근기가 낮은 이의 수행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절의 일상은 다르다. 새벽 예불에서 저녁 예불까지, 한국 불자가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것은 화두가 아니라 부처와 보살의 이름이다. 소리로 하는 수행이라는 점에서 염불은 밀교의 진언과도 닮았다. 다만 진언이 뜻을 풀지 않는 소리라면, 염불은 부르는 이가 그 이름의 주인을 안다.
처음 부르는 사람에게
염불은 시작하기 가장 쉬운 수행이다. 자리를 가리지 않고, 앉은 자세를 갖출 필요도 없다. 나무아미타불을 소리 내어 부르되, 소리를 귀로 다시 듣는다. 『관무량수경』이 소리가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한 것은 소리가 마음을 붙드는 줄이기 때문이다. 소리가 흐트러지면 마음이 다른 데로 갔다는 표시다.
횟수를 셀 필요는 없다. 담란의 말대로 열이라는 수는 업이 이루어짐을 밝힌 것이다. 염주를 돌리는 것은 세기 위해서라기보다 손을 소리에 묶어 두기 위해서다. 다만 『아미타경』이 붙인 조건 하나는 기억해 둘 만하다. 한마음으로 흐트러지지 않게. 입만 움직이는 염불은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내는 것일 뿐이다.
생각이 소리가 된 자리
염은 기억이었다. 붓다를 떠올리던 염불은 두려움 속에서 기댈 곳을 잊지 않는 일이었고, 그 기억은 시간이 흐르며 소리가 되었다. 생각할 수 없는 사람에게 남은 마지막 길이 부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생각은 쉽게 흩어지지만 소리는 자기 귀에 다시 들린다. 그래서 소리는 기억을 붙드는 가장 오래된 방법이다. 숨을 보다가 숨을 잊는 사람에게 사띠가 있다면, 부처를 생각하다 부처를 잊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있다. 열 번의 생각이 열 번의 소리가 된 그 자리에서, 염불은 처음 뜻을 잃지 않았다. 부르는 동안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