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수행

사띠는 기억이라는 말이었다

명상 앱의 마음챙김이 아니라 경전의 사띠. 사띠가 본래 기억을 뜻하는 말이었다는 데서 출발해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짝, 염처경의 네 가지 관찰과 한역 염처경의 차이, 기름 그릇 비유,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의 오해, 버마에서 다시 일어난 위빠사나와 한국까지.

·14분·최종 수정

지금 이 순간이라는 말

위빠사나라는 이름은 이제 절보다 명상 앱에서 더 자주 들린다. 그 곁에는 거의 언제나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붙고, 설명은 대개 비슷하다. 지금 이 순간에 주의를 두고, 떠오르는 것을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라. 1979년 존 카밧진이 미국 매사추세츠 의과대학에 스트레스 감소 클리닉을 열고 불교의 맥락을 걷어 낸 여덟 주짜리 프로그램을 만든 뒤로, 이 설명은 병원과 회사와 학교로 퍼졌다.

그런데 이 수행의 이름이 된 팔리어 사띠(sati)를 사전에서 찾으면 먼저 나오는 뜻은 뜻밖에도 기억이다. 지금 이 순간을 보라는 수행의 이름이 하필 지나간 것을 떠올린다는 말이다. 이 어긋남은 번역의 실수가 아니라, 위빠사나가 무엇을 하는 수행인지 묻는 가장 좋은 입구다.

멈춤과 꿰뚫어 봄

먼저 이름부터 갈라 두자. 위빠사나(vipassanā)는 나누어(vi) 보는(passanā) 것, 곧 꿰뚫어 봄이다. 한역은 관(觀)이라 옮겼다. 짝이 되는 말은 사마타(samatha), 마음이 가라앉아 멈춘 상태로, 한역은 지(止)라 했다. 『앙굿따라 니까야』의 짧은 경 하나가 둘을 나란히 세운다.

Dve me, bhikkhave, dhammā vijjābhāgiyā. Katame dve? Samatho ca vipassanā ca.

비구들이여, 밝은 앎에 이바지하는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둘인가. 사마타와 위빠사나다.

경은 이어서 둘의 쓰임을 가른다. 사마타를 닦으면 마음이 닦이고 탐욕이 버려진다. 위빠사나를 닦으면 지혜가 닦이고 무명이 버려진다(AN 2.31). 다른 경에서 아난다는 아라한에 이른 이들이 걸은 길을 넷으로 정리한다. 사마타를 앞세워 위빠사나를 닦는 길, 위빠사나를 앞세워 사마타를 닦는 길, 둘을 한 멍에에 매어 함께 닦는 길, 그리고 법을 향한 들뜸에 사로잡혔던 마음이 어느 때 안으로 가라앉아 하나가 되면서 길이 열리는 경우다(AN 4.170).

그러니 경전 안에서 위빠사나는 홀로 서는 이름이 아니다. 순서와 비중은 사람마다 달라도 멈춤과 꿰뚫어 봄은 짝으로 다닌다. 위빠사나가 하나의 독립된 수행 체계의 이름이 된 것은 뒤에 볼 근대의 일이다. 동아시아에서 같은 짝은 지관(止觀)이라는 이름으로 천태의 수행 체계가 되었다.

사띠는 기억이었다

사띠는 기억하다라는 뜻의 어근 스므리(smṛ)에서 왔다. 산스크리트로는 스므리티(smṛti)이고, 이 말은 인도에서 기억에 의지해 전해 온 전승 문헌 전체를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경전도 사띠를 그렇게 정의한다. 다섯 가지 기능(五根) 가운데 사띠의 기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붓다는 이렇게 답한다.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비구들이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사띠를 갖추었으니, 가장 높은 사띠와 분별을 갖추어 오래전에 한 일과 오래전에 한 말을 기억하고 거듭 떠올린다(SN 48.9).

1910년 『디가 니까야』의 『대념처경』을 영어로 옮긴 리스 데이비즈는 주석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 어원으로 보면 사띠는 기억이다. 그러나 불교가 일어날 때 흔히 쓰던 많은 말이 그랬듯 이 말에도 새로운 뜻이 덧붙었고, 그래서 기억이라고만 옮기면 오히려 오해를 부른다는 것이다. 그가 번역어로 쓴 영어가 mindfulness였고, 이 말이 그대로 오늘의 마음챙김이 되었다.

한역은 같은 말을 염(念)이라 옮겼다. 생각하다, 마음에 두다, 잊지 않다라는 뜻을 함께 가진 글자다. 팔정도의 일곱째 정념(正念)이 바로 이 사띠다. 부처의 이름을 부르는 염불의 염도 같은 글자다. 리스 데이비즈가 덧붙었다고 한 새로운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기억이라는 원래 뜻이 정말 떨어져 나갔는지는 경을 직접 읽어 보아야 알 수 있다.

네 곳에 사띠를 세운다

사띠 수행을 가장 자세히 설한 경이 『맛지마 니까야』 열째 경 『염처경(Satipaṭṭhānasutta)』이다. 붓다가 꾸루 지방의 깜마사담마에 머물 때 설했다고 전한다. 첫 문장은 이렇다.

Ekāyano ayaṁ, bhikkhave, maggo sattānaṁ visuddhiyā, sokaparidevānaṁ samatikkamāya, dukkhadomanassānaṁ atthaṅgamāya, ñāyassa adhigamāya, nibbānassa sacchikiriyāya, yadidaṁ cattāro satipaṭṭhānā.

비구들이여, 이것은 한 곳으로 가는 길이다. 중생을 깨끗하게 하고, 슬픔과 비탄을 건너게 하며, 괴로움과 근심을 사라지게 하고, 바른 길을 얻게 하며,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길, 곧 네 가지 사띠의 확립이다.

첫머리의 에까야나(ekāyana)는 오랫동안 유일한 길로 옮겨졌지만, 말 그대로는 한 방향으로 곧장 가는 길에 가깝고 주석서도 여러 풀이를 나란히 둔다. 네 가지는 몸(kāya), 느낌(vedanā), 마음(citta), 법(dhamma)이다. 한국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의 사념처(四念處)라 부른다.

몸의 관찰은 호흡에서 시작한다. 숲이나 나무 아래나 빈집에 가서 다리를 겹쳐 앉고 몸을 곧게 세운 뒤, 사띠를 앞에 세운다.

So satova assasati, satova passasati. Dīghaṁ vā assasanto 'dīghaṁ assasāmī'ti pajānāti.

그는 사띠를 지닌 채 숨을 들이쉬고, 사띠를 지닌 채 숨을 내쉰다.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안다.

경은 여기에 선반공의 비유를 붙인다. 숙련된 선반공이 길게 당길 때 길게 당긴다고 알고 짧게 당길 때 짧게 당긴다고 알듯이. 이어서 걷고 서고 앉고 눕는 자세, 나가고 들어오고 먹고 마시는 모든 동작을 분명히 아는 것, 머리카락에서 오줌까지 몸을 이루는 여러 부분, 네 요소, 묘지에 버려진 시신의 아홉 단계가 몸의 관찰로 이어진다.

느낌의 관찰은 지금의 느낌이 즐거운지 괴로운지 둘 다 아닌지를 아는 것이다. 마음의 관찰은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고, 흩어진 마음을 흩어진 마음이라고 아는 것이다. 법의 관찰은 다섯 가지 덮개, 다섯 무더기, 여섯 감각 영역, 일곱 깨달음의 요소, 네 가지 거룩한 진리를 차례로 살핀다.

되풀이되는 한 구절

『염처경』을 소리 내어 읽으면 관찰 하나가 끝날 때마다 같은 구절이 후렴처럼 되돌아온다.

'Atthi kāyo'ti vā panassa sati paccupaṭṭhitā hoti. Yāvadeva ñāṇamattāya paṭissatimattāya anissito ca viharati, na ca kiñci loke upādiyati.

또는 몸이 있다는 사띠가 그에게 확립되는데, 다만 앎을 위한 만큼, 거듭 새김을 위한 만큼이다. 그는 기대지 않고 머물며 세상의 어떤 것도 붙잡지 않는다.

여기 빠띠사띠(paṭissati)라는 말이 있다. 사띠에 되돌아온다는 접두사가 붙은 말, 곧 거듭 떠올림이다. 경은 지금 몸이 있음을 아는 일을 설명하면서 다시 기억의 말을 쓴다. 리스 데이비즈가 말한 새로운 뜻은 기억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사띠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힘에서, 지금 보아야 할 것을 놓치지 않고 계속 마음에 두는 힘으로 방향을 바꾼 기억이다. 숨을 보기로 했으면 숨을 보기로 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 생각에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순간, 그 돌아옴을 일으키는 것이 사띠다.

후렴에는 하나가 더 있다. 몸에서 일어나는 성질을 보고, 사라지는 성질을 보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성질을 본다. 사띠가 대상을 붙들고 있을 때 그 위에서 드러나는 것이 무상이고, 그것을 꿰뚫어 보는 것이 위빠사나다. 사띠는 자리를 지키고, 위빠사나는 그 자리에서 본다.

한역 염처경과 나란히 읽기

같은 경이 한문으로도 전한다. 동진의 구담승가제바가 옮긴 『중아함경』 아흔여덟째 경 『염처경(念處經)』이다. 첫 문장은 거의 그대로 맞물린다.

有一道淨眾生 度憂畏 滅苦惱 斷啼哭 得正法 謂四念處

한 길이 있어 중생을 깨끗하게 하고, 근심과 두려움을 건너게 하며, 괴로움과 번뇌를 없애고, 울음을 끊게 하며, 바른 법을 얻게 하니, 곧 네 가지 념처다.

그러나 나란히 놓고 읽으면 차이도 드러난다. 팔리본은 몸의 관찰을 호흡으로 시작하지만 한역본은 걷고 서고 앉고 눕는 자세로 시작하고, 호흡은 다섯째 자리에 온다. 한역본에는 팔리본에 없는 항목도 있다. 나쁜 생각이 일어나면 좋은 생각으로 다스리기를 목수가 먹줄을 대고 도끼로 깎아 바르게 하듯 하라는 것, 이를 맞물고 혀를 입천장에 붙여 마음으로 마음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느낌은 수(受)가 아니라 각(覺)으로 옮겨져 있다. 두 경은 같은 가르침이 서로 다른 부파의 입을 거쳐 전해지면서 각자의 모양을 얻었음을 보여 준다.

끝부분의 차이는 더 흥미롭다. 두 경 모두 네 가지 념처를 칠 년 닦으면 이번 생에 궁극의 앎을 얻거나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고 하고, 칠 년을 칠 개월로, 다시 칠 일로 줄여 간다. 팔리본은 칠 일에서 멈춘다. 한역본은 한 걸음 더 간다.

置七日七夜 六五四三二 置一日一夜 若有比丘比丘尼少少須臾頃立心正住四念處者 彼朝行如是 暮必得昇進 暮行如是 朝必得昇進

칠 일 칠 야는 그만두고, 엿새 닷새 나흘 사흘 이틀도 그만두고, 하루 낮 하루 밤도 그만두자. 비구나 비구니가 잠깐 동안이라도 마음을 세워 네 가지 념처에 바르게 머문다면, 아침에 그렇게 행하면 저녁에 반드시 나아가고, 저녁에 그렇게 행하면 아침에 반드시 나아간다.

기름 그릇을 든 사람

사띠가 어떤 마음 상태인지 경전이 가장 생생하게 그린 장면은 『상윳따 니까야』에 있다.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춤추고 노래한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 군중과 여인 사이로 한 사람이 기름이 가장자리까지 찰랑이는 그릇을 들고 지나가야 한다. 뒤에는 칼을 뽑아 든 사람이 바짝 따라오며,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치겠다고 한다.

Api nu so puriso amuṁ telapattaṁ amanasikaritvā bahiddhā pamādaṁ āhareyyā?

그 사람이 기름 그릇에서 마음을 떼고 바깥에 정신을 팔겠는가?

비구들은 아니라고 답하고, 붓다는 가득 찬 기름 그릇이 몸에 대한 사띠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풀어 준다(SN 47.20). 이 사람은 춤을 못 본 척하지 않는다. 음악은 들리고 군중은 밀려온다. 다만 그 모든 것 가운데서 그릇을 잊지 않는다. 느긋하게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는 장면과는 거리가 멀다. 사띠는 여기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지킴이다.

바로 앞의 경은 대나무 장대 위의 곡예사 둘을 등장시킨다. 스승은 서로를 지켜 주자고 하고, 제자는 각자 자기를 지키면 둘 다 무사히 내려올 수 있다고 답한다. 붓다는 제자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한 줄을 덧붙인다. 자기를 지키는 이가 남을 지키고, 남을 지키는 이가 자기를 지킨다(SN 47.19). 남을 지키는 방법으로 꼽힌 것은 인내와 해치지 않음과 자애와 연민이다. 사띠는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의 기술로 끝나지 않는다.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

여기서 처음의 설명으로 돌아가 보자. 판단하지 않고 바라보라는 말은 절반쯤 맞다. 『염처경』의 마음 관찰은 탐욕이 있는 마음을 보고 나쁘다고 꾸짖지 않는다. 탐욕이 있는 마음을 탐욕이 있는 마음이라고 알 뿐이다. 자책도 변명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름 붙이는 것, 그것은 분명히 수행의 한 축이다.

그러나 경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다섯 가지 덮개를 관찰하는 대목은 이렇게 이어진다.

Yathā ca anuppannassa kāmacchandassa 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uppannassa kāmacchandassa pahānaṁ hoti tañca pajānāti, yathā ca pahīnassa kāmacchandassa āyatiṁ anuppādo hoti tañca pajānāti.

일어나지 않은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 일어난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알며, 버려진 감각적 욕망이 어떻게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안다.

이것은 아무 평가도 없는 관찰이 아니다. 무엇이 해로운지, 그것이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끝나는지를 아는 일이다. 매 관찰에 붙는 수식어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열심히(ātāpī), 분명히 알며(sampajāno), 사띠를 갖추어, 세상에 대한 욕심과 근심을 버리고. 사띠는 혼자 일하지 않는다. 노력과 분명한 앎과 함께 움직이고, 그 목적지는 편안한 기분이 아니라 괴로움의 끝이다.

기억이라는 원래 뜻이 여기서 다시 살아난다. 사띠가 기억하는 것은 지금의 대상만이 아니다. 무엇을 하기로 했는지, 무엇이 해롭고 무엇이 이로운지,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도 함께 기억한다. 판단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덧붙이는 반응을 내려놓는다는 뜻이지, 방향을 잊는다는 뜻이 아니다. 현대의 마음챙김 프로그램이 병원에서 거둔 성과는 그것대로 값지지만, 경전의 사띠는 그보다 넓은 지도를 품고 있다. 그 지도의 이름이 팔정도이고, 정념은 그 여덟 가운데 하나다.

버마에서 다시 일어난 길

위빠사나가 오늘처럼 하나의 수행 이름으로 세계에 퍼진 데에는 근대 버마의 역할이 크다. 오랫동안 남방 불교에서도 깊은 명상은 소수의 출가자 몫으로 여겨졌다. 19세기 말 영국 식민 지배 아래에서 불교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지자, 레디 사야도(1846~1923)가 재가자도 아비담마를 배우고 위빠사나를 닦을 수 있다고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을 대중 운동으로 만든 사람이 마하시 사야도(1904~1982)다. 1949년 당시 총리 우 누 등의 요청으로 양곤에 온 그는 그해 12월 4일 타타나 예익타 명상 센터에서 첫 수행자 스물다섯 명을 지도했다. 몇 년 사이에 같은 방식의 센터가 버마 전역에 백 곳 넘게 생겼다. 마하시 방식은 배가 부풀고 꺼지는 움직임을 기본 대상으로 삼고,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짧은 말로 새기며 알아차린다. 집중 수행 기간에는 앉기와 걷기를 번갈아 하며 하루 대부분을 사띠 속에서 보낸다.

같은 무렵 레디 사야도의 계보에서 나온 우 바 킨과 그 제자 고엔카는 몸의 감각을 훑는 방식으로 열흘짜리 코스를 만들었고, 이것도 세계로 퍼졌다. 서양에서 이 수행을 배운 이들이 돌아가 세운 센터들이 다시 카밧진 같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앱 속의 마음챙김은 이 긴 사슬의 가장 끝에 있다.

한국에는 1980년대 말부터 스리랑카와 태국과 미얀마에서 위빠사나가 들어왔다. 배우기 쉽고 경전에 적힌 방법을 그대로 따른다는 점 때문에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자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고, 한동안 간화선과 위빠사나 가운데 어느 쪽이 부처의 본래 수행에 가까운지를 두고 논쟁이 이어졌다.

세 갈래 길

이 사이트의 수행 글은 이제 네 편이 되었다. 소리로 부처를 붙드는 염불은 결이 조금 다르고, 앉아서 마음을 다루는 나머지 세 길은 같은 자리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들어간다.

간화선은 풀리지 않는 물음 하나로 생각을 막다른 데까지 몰아 개념의 그물을 찢는다. 밀교는 깨달은 이의 손 모양과 소리와 형상을 먼저 입고, 그것이 원래 자기 것이었음을 확인한다. 위빠사나는 아무것도 보태지 않는다. 화두도 진언도 없이, 이미 일어나고 있는 숨과 감각과 마음을 놓치지 않고 본다.

세 길이 서로를 비판해 온 역사도 길다. 간화선 쪽에서 보면 위빠사나는 대상을 쪼개 보는 데 머무는 점진적 수행이고, 위빠사나 쪽에서 보면 화두는 경전에 근거가 없는 후대의 고안이다. 그래도 세 길이 경계하는 병은 같다. 깨어 있지 않은 고요함이다. 대혜는 그것을 무기(無記)라 불렀고, 『청정도론』은 집중이 노력보다 지나치면 게으름이 마음을 덮는다고 하면서 사띠는 어디서나 필요하다고 했다. 세 길 모두 그 병을 피하려고 각자의 도구를 고안했다.

처음 앉는 사람에게

위빠사나는 세 길 가운데 혼자 시작하기가 가장 쉽다. 특별한 입문 의식이 필요 없고, 대상은 이미 몸에 있다. 그래도 집중 수행에 들어가려면 지도자가 있는 곳에서 하는 것이 좋다. 오래 앉다 보면 몸과 마음에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올라오기도 하고, 그때 점검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

혼자라면 호흡에서 시작한다. 숨을 조절하지 않고, 들어오고 나가는 그대로 둔다. 길면 길다고, 짧으면 짧다고 안다. 생각에 끌려갔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을 실패로 여기지 말고 돌아온다. 그 돌아옴이 바로 연습하는 근육이다. 앉아 있기 힘든 날은 걸으면서 발이 들리고 나아가고 놓이는 것을 본다. 『염처경』에서 걷기는 앉기와 같은 무게의 관찰이다.

길게 앉을 필요는 없다. 한역 『염처경』이 말한 대로 잠깐이라도 바르게 머물면 아침의 수행이 저녁에 이른다. 다만 경계할 것이 하나 있다. 편안해지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편안함은 따라올 수 있지만, 경전이 사띠에게 맡긴 일은 편안함이 아니라 분명히 보는 것이다.

사띠는 기억이라는 말이었다

사띠가 기억이라는 사실은 처음에는 이상해 보인다. 지금을 보라는 수행에 왜 과거의 말을 썼을까. 그러나 경을 읽고 나면 그 말이 정확했다는 쪽으로 기운다. 우리가 지금을 놓치는 것은 볼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보기로 한 것을 잊어서다. 숨을 보다가 숨을 잊고, 걷다가 걷고 있음을 잊는다. 사띠는 그 잊음을 알아차리고 돌아오게 하는 힘이다.

기름 그릇을 든 사람은 아름다운 춤을 외면하지 않는다. 다만 자기 손에 무엇이 들려 있는지를 잊지 않는다. 위빠사나는 그 기억 위에서 비로소 본다. 일어나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을, 붙잡을 것이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