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는 거꾸로 물었다
십이연기를 무명에서 노사로 읽는 삼세양중인과, 아비달마가 나눈 네 가지 연기 해석, 그리고 경전이 기록한 본래의 물음. 순관과 역관과 환멸문이 어떻게 뒤섞였고 그 차이가 수행에서 무엇을 바꾸는지 짚는다.
순서를 외워도 남는 물음
십이연기의 열두 고리는 외우기 어렵지 않다.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다. 문제는 이 순서를 어느 방향에서 읽느냐다. 같은 열두 고리를 두고 2,000년 동안 해석이 갈렸고, 그 갈림이 수행에서 무엇을 보는지까지 바꿨다.
표준이 된 그림
가장 널리 통용된 해석은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이다. 열두 고리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나누어 배치하고, 두 겹의 인과로 읽는다. 무명과 행이 과거의 원인이고, 식에서 유까지 여덟이 현재이며, 생과 노사가 미래의 결과다. 남전 상좌부의 『청정도론』도 이 배치를 쓴다. 무명과 갈애를 뿌리로 두고 삼세에 둘, 여덟, 둘을 배분해 존재의 바퀴(bhavacakka)를 설명한다.
이 그림은 강력하다. 윤회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한 장에 담아내고, 업과 과보의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대신 대가가 있다. 설명의 양 끝이 지금 볼 수 없는 것에 놓인다. 과거의 무명과 행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생과 노사는 아직 오지 않았다. 냐나위라 테라는 이 점을 들어, 연기의 정형구가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인데 삼세로 나눈 해석은 없는 것을 조건으로 삼아 버린다고 비판했다. 열두 고리 가운데 실제로 관찰되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라는 물음이다.
아비달마는 이미 네 갈래로 읽었다
연기를 삼세로 읽을 것인가 지금 이 순간으로 읽을 것인가는 근대의 논쟁이 아니다. 『아비달마구사론』은 이미 네 가지 읽기를 나란히 소개한다.
찰나연기(刹那緣起)는 한 찰나에 열두 고리가 동시에 갖추어진다고 본다. 구사론이 든 예가 선명하다. 탐욕으로 살생을 저지르는 그 한순간에 무명에서 노사까지가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박연기(連縛緣起)는 열두 고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상속한다고 본다. 원속연기(遠續緣起)는 여러 생에 걸쳐 시간을 건너뛰며 이어진다고 본다. 분위연기(分位緣起)는 열두 고리가 각각 오온을 본질로 삼아 매 순간 생멸하지만, 그 순간에 두드러진 상태를 골라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본다.
설일체유부는 이 가운데 분위연기를 정설로 택했고, 삼세양중인과의 그림이 거기서 나온다. 곧 삼세로 읽는 해석은 다른 읽기를 몰라서 택한 것이 아니다. 네 갈래를 알고 하나를 고른 결과다.
순관과 역관과 환멸문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세 개다. 순관은 무명에서 노사로 내려가며 관찰하는 것이고, 환멸문은 무명이 멸하므로 행이 멸한다는 식으로 소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역관은 노사에서 출발해 그 조건을 거슬러 묻는 것이다.
문제는 역관과 환멸문이 오래 같은 것으로 다루어져 왔다는 점이다. 주석 전통은 조건에서 생김을 보는 것이 순관의 연기이고 조건에서 사라짐을 보는 것이 역관의 연기라고 정리했다. 이렇게 두면 역관은 소멸을 보는 일이 되고, 노사에서 거슬러 묻는 사유는 갈 자리를 잃는다.
우동필은 2015년 논문에서 이 겹침을 정면으로 다루었다. 역관은 노사의 자리에서 조건을 추적해 무명까지 올라가는 사유이고 환멸문은 무명이 멸한 자리에서 노사의 멸을 관찰하는 흐름이라, 출발점도 논리의 방향도 다르다는 것이다. 역사로 보아도 앞의 것은 출가할 때의 문제의식이고 뒤의 것은 깨달은 뒤의 내용이다. 그는 4니까야에서 한역 역(逆)에 해당하는 팔리어 paṭiloma가 십이연기의 흐름을 가리키는 데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짚는다. 이 말은 여덟 가지 해탈과 아홉 단계 선정을 순서대로 또는 거꾸로 드나드는 대목에만 나온다.
무엇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
본래의 물음은 경전에 그대로 남아 있다. 상윳따 니까야의 성읍경에서 붓다는 깨닫기 전의 자기 생각을 이렇게 옮긴다.
kimhi nu kho sati jarāmaraṇaṁ hoti, kiṁpaccayā jarāmaraṇan ti
무엇이 있을 때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 무엇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있는가. 이어지는 문장은 답이 어떻게 왔는지를 말한다. 이치에 맞게 마음을 기울인 데서 지혜의 꿰뚫음이 있었고, 생이 있을 때 노사가 있으며 생을 조건으로 노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에서 유로, 유에서 취로, 취에서 애로 거슬러 오른다.
이 경에서 눈에 띄는 것은 물음이 멈추는 자리다. 식은 무엇을 조건으로 하는가를 물었을 때 답은 명색이었다.
paccudāvattati kho idaṁ viññāṇaṁ nāmarūpamhā na paraṁ gacchati
이 식은 명색에서 되돌아오고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열두 고리를 다 세우지 않고 식과 명색이 서로를 조건으로 삼는 자리에서 사유가 되돌아온다. 이 경에는 무명도 행도 나오지 않는다. 와츠지 테츠로가 노사에서 무명으로 거슬러 오르는 역관이 본래의 형태라고 본 이래, 열두 고리가 처음부터 열둘이었는지를 묻는 문헌학 연구가 이어져 왔다.
거슬러 오르는 길에 놓인 다섯 갈림
역관을 되살려 읽으면 십이연기가 중도와 붙는다. 우동필의 정리에 따르면 거슬러 오르는 물음은 당시 인도 사상들이 다투던 주제를 차례로 통과한다.
유와 생과 노사를 묻는 구간에서는 있다와 없다의 대립을 만난다. 갈애와 취의 구간에서는 하나냐 여럿이냐가 걸린다. 수의 구간은 괴로움이냐 즐거움이냐의 문제이고, 식과 명색과 육처와 촉의 구간은 내가 지었느냐 남이 지었느냐, 곧 주관과 객관의 문제다. 무명과 행의 구간에서는 영원하다는 견해와 끊어진다는 견해가 부딪친다.
중도가 이 다섯 쌍을 각각 넘어서는 자리라면, 십이연기는 윤회의 도표이기 이전에 존재와 가치와 인식에 관한 해명이 된다. 이렇게 읽을 때 사성제의 고성제가 왜 노사인지도 분명해진다. 늙음과 죽음이 물음의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此와 彼는 번역이 만든 구별인가
연기를 요약하는 정형구는 한문으로 이렇게 전해졌다. 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
팔리 원문은 imasmiṁ sati idaṁ hoti, imass'uppādā idaṁ uppajjati다. 여기서 imasmiṁ과 idaṁ은 모두 같은 대명사 ima의 격변화 형태다. 이것과 저것이 아니라 이것과 이것이다. 팔리어에서 대명사를 반복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둘을 나열하는 용법이 아니라 각각 모두를 가리키는 용법이므로, 열한 번 반복될 문장을 한 줄로 줄인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다. 삼세양중인과설에 반대하며 십이연기를 사물들의 상호의존으로 읽는 상관상의설은 차와 피에 해당하는 원어가 같으니 둘을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같은 사실이 반대 결론에도 쓰인다. 원어가 같으니 애초에 차와 피로 갈라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널리 인용되는 그 한 문장이 번역을 한 겹 지나온 문장이라는 점은 알고 읽는 편이 낫다.
앉아서 무엇을 보는가
해석의 차이는 책상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
삼세로 읽으면 십이연기는 믿고 받아들일 도표가 된다. 과거의 무명은 관찰 대상이 아니라 전제가 되기 때문이다. 찰나로 읽으면 열두 고리는 지금 앉은 자리에서 확인할 대상이 된다. 눈이 대상과 마주치고(촉), 느낌이 일어나고(수), 그 느낌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애), 그것을 붙잡는(취) 연쇄는 하루에 수백 번 돌아간다. 어느 고리에서 끊을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 수행이 된다.
역관은 거기에 방향 하나를 더한다. 답을 위에서 내려받지 않고, 지금 걸리는 괴로움에서 출발해 무엇이 있을 때 이것이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붓다가 깨닫기 전에 했다고 기록된 그 물음은 깨달은 사람의 결론이 아니라 아직 모르는 사람의 물음이다. 그래서 그것만은 지금 그대로 빌려 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