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경전법화경

같은 구절을 네 번 읽는다

지의가 587년에 강설한 법화문구는 경문 한 구절을 인연, 약교, 본적, 관심 네 관점으로 거듭 읽는다. 사종 해석법이 무엇이고 개적현본이 법화경 28품을 어떻게 반으로 가르는지, 그리고 네 번째 관심석이 왜 나머지 셋과 다른지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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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이 하나 더 필요했던 이유

구마라습이 『묘법연화경』을 한문으로 옮긴 뒤 중국에서 법화경 주석은 이미 넘칠 만큼 나와 있었다. 그런데 천태 지의(智顗, 538~597)는 587년 금릉 광택사에서 이 경을 다시 강설했다. 제자 관정(灌頂)이 받아 적고 나중에 손을 보아 정리한 것이 『법화문구(法華文句)』 10권이다.

지의가 남긴 저술 가운데 『법화현의』, 『법화문구』, 『마하지관』 셋을 천태 삼대부라 부른다. 현의가 경의 제목에서 출발해 가르침 전체의 뜻을 세우고, 마하지관이 앉아서 하는 수행을 다룬다면, 문구는 경문을 한 구절씩 따라가며 푸는 책이다.

문제는 한 구절씩 푸는 주석이라면 앞선 학승들도 이미 했다는 점이다. 지의가 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읽는 방법이었다. 한 구절을 여러 겹으로 읽는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다섯 사람의 주석을 같은 경문 아래 나란히 세운 금강경 오가해는 그 일을 한 사람의 머릿속이 아니라 여러 목소리로 벌여 놓은 쪽이다.

한 구절을 네 번 읽는다

『법화문구』는 경문 하나하나를 네 가지 관점에서 거듭 읽는다. 이것을 사종석(四種釋)이라 한다. 인연석, 약교석, 본적석, 관심석이다.

인연석

첫째는 인연석(因緣釋)이다. 이 구절이 왜 여기서 나왔는가를 부처와 중생 사이의 일로 본다.

중생 쪽에서 진실을 구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부처 쪽에서 거기에 응한다. 그 둘이 맞닿는 것을 감응도교(感應道交)라 한다. 인연석은 경문 한 구절을 그 맞닿음의 기록으로 읽는다. 누가 무엇을 물었기에 이 말이 나왔고, 그 말이 듣는 이를 어디로 데려가려 했는가를 본다.

약교석

둘째는 약교석(約敎釋)이다. 교판에 비추어 읽는다.

천태는 부처의 가르침을 시기와 성격으로 나누어 정리했다. 다섯 시기와 여덟 갈래로 가르는 오시팔교가 그것이고, 그 가운데 가르침의 내용을 넷으로 나눈 것이 장, 통, 별, 원의 화법사교다. 약교석은 지금 읽는 구절이 그 지도 위 어디에 놓이는지를 먼저 확인한다. 같은 말이라도 듣는 이의 그릇에 따라 다른 층위로 설해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본적석

셋째는 본적석(本迹釋)이다. 본(本)과 적(迹), 두 문으로 나누어 읽는다.

적(迹)은 발자국이라는 뜻이다. 자취로 드러난 쪽, 곧 역사 속에서 태어나 깨닫고 가르친 부처를 가리킨다. 본(本)은 그 발자국을 남긴 본래 자리다. 본적석은 이 구절이 자취를 말하는지 본바탕을 말하는지를 갈라 읽는다.

관심석

넷째는 관심석(觀心釋)이다. 경을 내 마음에서 읽는다.

『법화문구』는 관심의 모습을 말하면서, 자기 마음에 의지해 계와 정과 혜를 논하여 삼분을 이룬다고 했다. 경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과 비유를 바깥에서 벌어진 일로 두지 않고, 지금 이 마음에서 무엇에 해당하는지를 본다는 뜻이다.

앞의 셋이 경의 뜻을 이론으로 붙잡는 일이라면, 넷째는 그 이해를 직접 겪는 쪽으로 돌려놓는다. 지의의 법화경 해석을 다른 학승의 것과 갈라놓는 지점이 여기다.

28품을 반으로 가르다

사종석 가운데 본적석은 해석 기법에 그치지 않고 경 전체의 구조를 다시 짰다.

천태는 법화경 28품을 둘로 나눈다. 앞의 14품, 서품 제1에서 안락행품 제14까지가 적문(迹門)이다. 뒤의 14품, 종지용출품 제15에서 보현보살권발품 제28까지가 본문(本門)이다.

적문은 자취를 다룬다. 삼승이 사실은 일승이라는 것,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여기서 열린다. 본문은 그 자취를 남긴 부처가 누구인가로 넘어간다. 보리수 아래에서 비로소 깨달은 것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먼 옛날에 이미 이루었다는 구원성불이 여기서 드러난다.

자취를 열어 본바탕을 드러낸다 하여 이것을 개적현본(開迹顯本)이라 한다. 법화경을 읽다가 15품에서 갑자기 땅이 갈라지고 헤아릴 수 없는 보살이 솟아오르는 장면을 만나면 이야기가 끊긴 것처럼 느껴지는데, 천태의 분과는 그 지점이 끊긴 자리가 아니라 문이 바뀌는 자리라고 말한다.

방편은 버리는 것이 아니다

법화경을 읽을 때 가장 자주 걸리는 대목이 방편이다. 세 가지 수레는 임시였고 진짜는 하나라면, 임시였던 것은 거짓이었다는 말인가.

『법화문구』는 방편과 권(權)의 관계를 여러 겹으로 따진 끝에, 방편이 곧 진실이라는 자리에 선다. 권이 바로 방편이어서 둘이 아니고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불타는 집에서 아이를 불러낸 수레 이야기는 속임수의 기록이 아니라, 그 부름 자체가 이미 진실이 일하는 방식이었다는 뜻이 된다.

이 대목은 법화경 자체의 일승 사상과 짝을 이룬다. 경이 선언한 것을 주석이 이론으로 받아낸 셈이다.

관심석이 남긴 것

네 번째 해석법은 뒷날 비판도 받았다. 경이 말하지 않은 것을 읽는 이의 마음에 비추어 끌어내는 방식이라 주관으로 기운다는 지적이다.

다만 이 방식이 열어 놓은 길은 분명하다. 경의 뜻을 바르게 붙잡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뜻을 읽는 사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통로가 생겼다. 교리를 따지는 일과 실제로 앉아 닦는 일이 한 체계 안에서 만나게 된 것이고, 그 만남이 『마하지관』의 방대한 수행론으로 이어진다.

한 마음 안에서 공과 가와 중을 함께 본다는 천태의 삼제 사상도 이 길 위에 있다. 중도를 둘 사이의 타협이 아니라 셋을 동시에 보는 자리로 읽는 관점이 여기서 나온다.

지금 읽는 사람에게

법화문구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일은 전문가의 몫이다. 다만 읽는 방법 하나는 가져올 수 있다.

경전의 한 문장을 만나면 네 번 물어보는 것이다. 이 말은 누구의 물음에 대한 답인가. 어느 층위의 가르침인가. 자취를 말하는가 본바탕을 말하는가. 그리고 이것이 지금 내 마음에서는 무엇인가.

앞의 셋은 책을 덮으면 끝나지만 넷째는 그렇지 않다. 화두 하나를 들고 앉는 간화선이 뒷날 다른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게 되는데, 경을 읽는 일과 마음을 보는 일을 떼어놓지 않으려 했다는 점에서는 뿌리가 닿아 있다.